Posted on 2009. 09. 10.


5급 을 서기보에서 지사장까지 거침없이 달려온 철의 여인!


변화를 거듭해온 (주)KT 역사의 산증인!

 

47회  완주 경력 갖춘 마라토너 박 종 남 (주)KT 성북지사장

 

 

 

“대한민국에 양성평등이란 없다고 처음부터 생각했어요.

남과 똑같으면 안 된다고 마음먹었죠. 업무에 비상할 정도로 집중했어요.

  그리고 인간관계의 중요성도 새겼어요.”

 


지난 9월 5일 박종남(55) (주)KT성북 지사장은 임기 4년을 맞았다. KT의 지사장 임기가 보통 2년인데 비해 비교적 장수하는 지사장이다. KT성북지사는 성북구내 11개 동을 관장한다.


영업 3개부서와 기술 2개부서를 두고 있으며 50명의 직원 중 기술부서에 30여 명이 배치돼 있다.
현재 전화고객 6만여 명, 인터넷가입고객 1만8천여 명에 이른다. 한국전기통신공사에서 현재의 KT로 전환돼 온 과정은 그대로 우리나라 정보통신의 역사가 된다.


박 지사장의 말처럼 “독점인지도 모를 정도로” 한국사회의 전기, 정보통신 분야의 기술력과 인력을 보유하며 산업을 이끌었던 KT는 지금 다른 업체들과 피 말리는 고객유치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박 지사장이 이끄는 성북지사는 그 동안 진행해왔던 프로젝트의 성과를 결산하는 마감 한 달여를 앞두고 서울 KT 지사 중 2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고지를 눈앞에 두고 박 지사장은 조금만 더 노력하자고 직원들을 독려한다. 영업 관리에 집중하고 있는데 특히 인터넷 가입 고객을 늘리는 데 역량을 쏟고 있다.


“인터넷 가입을 하면 다른 상품들의 가입도 수월해지거든요. 인터넷 수준은 다른 업체보다 KT가 뛰어난 것은 사실이에요. 기술 품질 면에서 확실히 차이가 있지요. 인터넷을 기반으로 사업을 하는 기업이라든지 광고회사, 관공서 등은 거의 KT 고객이라고 할 수 있죠”  라고 말하는 박 지사장은 영락없는 KT맨이다.

 
속도나 품질 보다 가격경쟁이 우선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박 지사장은 못내 아쉽고 속상한 듯 했다.


박 지사장은 1975년 공무원 시험을 치러 당시 총무처 ‘5급 을’ 서기보로 경력을 시작했다.
1981년 체신부에서 한국전기통신공사로 분사될 때 그대로 조직 이동을 해 현 KT의 역사를 함께 시작했다.

 
이후 공사는 정부출자기관으로 전환됐다가 2002년 민영화됐고 올 초에 자회사였던 KTF를 합병해 유·무선, 위성통신 영역을 망라하는 거대 기업으로 새로운 출발을 내딛었다. 이 전 과정이 박 지사장의 35년 직장 경력과 궤를 같이 한다.


최근 유선전화 사업이 위축되고 정보통신 업체 간의 경쟁이 치열해진 상황을 걱정하는 소리들이 들리지만 박 지사장은 “경쟁하면서 서로 잘 성장했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

 

 

국제통신 요금정산 업무부터 영업과 마케팅, 경영관리에 이르는 전방위적 경력

 

 

박 지사장은 단신에 자그마한 몸집을 지닌 여성이다. 그녀는 인터뷰 내내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었고, 에피소드를 들려줄 때는 표정과 손짓, 몸짓을 함께 써가며 입체적으로 표현했다.


뒤이어 오십견을 예방하고 몸의 경직을 풀어주는 체조를 소개할 때는 직접 시범을 보여줄 정도로 적극적이고 개방적이었다.


늘 자신을 단련하고 다른 이들의 행동을 이끌어 내는 데 자신감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태도로 보였다. 그녀의 35년 경력을 좀 더 자세히 들어봤다.


박 지사장은 우체국에서 잠시 근무한 뒤 국제전화국으로 이동, 국제통신요금 정산업무를 맡게 된다. 80년대 세계 각국의 통신회사들과 일일이 국제통화 내역과 요금 정산을 대조해가며 누락됐거나 과금 사례를 찾아내 돈을 되돌려 받는 업무를 무려 11년 가까이 했다. 35년 근무 경력에서 가장 오랜 동안 맡았던 업무였다.

 

“당시는 각 국의 시간에 맞춰 밤중에도 텔렉스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확인해야 하는 상황이었죠. 국익을 좌우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밤낮 없이 일했던 때였어요.” 


11년 반 정도의 업무를 마치고 1991년 6월 국제통신 홍보업무 부서로 이동, 경쟁의 최일선에 서게 된다. 한국통신이 독점하고 있던 국제전화통신 영역에 경쟁체제가 도입된 데 따른 것이다.


“이때가 제 생의 전환기 중 하나였어요. 찾아오는 고객만 대했던 업무에서 직접 찾아다니면서 영업을 했으니까요. 가방 들고 다니면서 국제 전화를 이용하는 고객들을 찾아다녔지요. 매뉴얼도 없는 상황이었기에 영업에 필요한 고객 리스트를 만들고, 직접 방문하여 상품을 소개하고 신상품 개발계획 등을 설명하면서 기업의 통신담당 부서 직원들을 상대했어요. 당시 기업의 통신담당 부서는 그 기업 내에서도 다소 소외된 부서로 인식된 경우가 많아서 제가 직접 찾아가 자세한 설명을 해주면 대단히 고마워하고 오히려 환대할 지경이었어요. 그 때 만났던 분들 중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분들이 많아요.”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처음으로 영업이라는 세계를 접해본 박 지사장은 “직업관을 확고히 한 계기”였다고 회고했다.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알게 됐어요. 제가 해왔던 일들 영역 밖에 얼마나 다양하고 풍부한 세계가 있는지 깨닫게 해줬어요.”


회사도 경쟁에 대처해야 할 구체적 계획을 갖지 못한 채 막연한 비전만으로 시작했던 일이었는데 박 지사장이 진행해가는 방식을 토대로 사업의 윤곽을 잡아나갔다고 한다.


체계가 잡히면서 박 지사장은 마케팅 부서 내 광고부로 자리 이동한다. KT의 실질적인 상품전략과 광고를 전담할 부서였다. 영업을 지원하는 마케팅의 영역으로 들어선 것이다.


상품을 소개하는 팜플렛을 만들고 DM 발송 등의 업무도 박 지사장이 윤곽을 잡아나간 매뉴얼 중 하나다.  
99년에 구조조정이 이뤄지면서 박 지사장은 본격적인 일선 영업 현장 관리자로 나선다.


당시 서울 강남의 영동지사는 서울시는 물론 전국에서도 가장 매출 규모가 큰 지사였다. 그럼에도 ‘코엑스’ 구내 통신 시장을 놓고 유치경쟁을 하고 있던 영동지사는 타 통신업체와의 경쟁에서 뒤처진다는 신호를 감지하고 있었다.


본사가 박 지사장을 영동지사장으로 발령하면서 맡긴 임무는 ‘시장을 마크하라’였다. 박 지사장은 약점이라고 판단했던 위탁업체의 권한을 회수해 직접 고객 유치 전쟁에 뛰어들었다.


일주일, 보름 단위로 고객사를 직접 방문했고 매일 담당자들과 통화하며 관리해 나갔다. 경쟁회사에 선점을 빼앗겼던 시장을 점차 회복해 예상을 뛰어넘는 성과를 이뤄냈다. 신상품이 나올 때마다 고객 유치에 탁월한 실적을 이뤄내는 박 지사장의 성과에 회사도 주목했다.


박 지사장은 다시 본사로 복귀, 법인고객을 담당하며 기획업무를 맡았다. 이 때 직위는 부장이었다. 인력관리실의 복지팀, 여의도영업사무소 등 조직행정과 경영 및 영업에 이르는 사업수행 경험을 두루 거치며 KT 성북지사장에 이르렀다.      

 

 

건강과 활력, 자신감 찾아준 마라톤

 

 

박 지사장은 국제통신 홍보업무를 맡아 한창 일에 매진할 때 건강상의 중대한 고비를 맞았다. 원래 체력적으로도 병약한 편이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의사들이 왕진을 오갈 정도로 약골이었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소극적인 아이였어요.” 피곤한 상태가 3년 넘게 이어졌고 불면증도 왔다.


몸에 손이 닿기만 해도 아플 지경이었다고 한다. 몸에는 갓 40을 넘은 나이에 맞지 않게 각질이 일었다.
불면증을 견디기 위해 집 주변을 걷고 뛰었다. 꾸준히 해가면서 점점 몸이 좋아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잠도 푹 잤다.


당시는 마라톤이 일반인에게까지 확산되지 않았던 터라, 서점에서도 마라톤 전문서적을 찾을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체육학과에 다니는 지인에게 육상서적을 구해 읽어가면서 마라톤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마라톤이 자신의 몸에 맞는다는 진단도 받은 뒤 본격적으로 마라톤에 빠져든다.

 

박 지사장은 ‘서울여성마라톤클럽’을 조직하고 여성 마라톤 저변 확대에 기여했다. 사내에서도 마라톤 모임을 만들어 직원들과 함께 뛰곤 했다.

 

지금까지 마라톤 완주만 47회를 했다. 1995년 처음으로 하프마라톤을 뛰고 1998년 첫 마라톤 풀코스를 뛴 후 약 10년 사이에 이룬 완주 경력이다. 조선일보 주최 마라톤 대회에는 연속 10회 출전자로 명예의 전당에도 올랐다. 총 43명 중 한 명이다.


마라톤뿐만 아니라 이제는 산악마라톤, 야간 산행, 스쿠버다이빙, 승마, 경비행기 운전까지 온갖 스포츠를 섭렵하는 철의 여인이 됐다. 학창시절 선생님이나 친구들, 직장 초년시절 동료들과 다시 만났을 때 그녀의 달라진 모습에 다들 놀란다고 한다.


박 지사장은 새벽 5시 30분이면 자택이 있는 대치동을 출발해 보문동의 지사까지 출근, 1시간 정도 근처 헬스클럽에서 반드시 운동을 한다. 체력을 다지는 건 물론 지역주민들과 자질구레한 일상부터 일 얘기까지 터놓고 얘기하며 도움도 주고받는 부가효과도 생겼다. 운동 후 8시면 출근을 마친다. 운동으로 인해 그녀는 건강을 되찾았고 삶의 활기를 만끽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영업 업무를 맡으면서는 더 부지런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된 계기가 됐고, 마라톤하면서 노력하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 당당함을 찾았어요. 두 번의 고비를 넘기면서 단단해졌다”고 말하는 박 지사장의 얼굴에는 감회가 어렸다.

 

 

직장여성, “남과 똑같으면 안 된다.”

 

 

35년 동안 직장 생활을 하면서 여성 지사장(현재 KT서울지사에서 여성 지사장이 있는 곳은 공항, 가락, 그리고 성북 정도이다)에 오를 때까지 그녀가 겪었을 어려움이 짐작됐다.


“제가 입사하던 시절만 해도 여성 직원이 많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주로 회계부서 정도에 배치됐어요, 그나마 부서에서도 중요 업무는 맡지 못했어요. 대한민국에 양성평등이란 없다고 처음부터 생각했어요. 남과 똑같으면 안 된다고 마음먹었죠. 업무에 비상할 정도로 집중했어요. 그리고 인간관계의 중요성도 새겼어요. 경조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습니다. 회식자리에도 빠지지 않았어요. 술을 잘 마시지 못했지만 마시는 법을 ‘개발’했어요. 하여튼 일말의 꼬투리도 잡히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지요. 어떤 사람도 적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애썼어요.”


그럼에도 단 한 번의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겠는가?


“직장에서는 정말이지 구차한 말이나 부탁을 하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는데, 딱 한 번 상사에게 구차한 말을 해야 할 때가 있었어요.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던 어느 날 아이 담임으로부터 아이가 이틀 동안 학교를 나오지 않았다는 전화 연락을 받았어요.

 

 아무래도 잠깐 다녀와야겠다는 말을 하고 아이를 찾아 나섰어요. 동네에서 강아지를 안고 놀고 있는 아이를 발견했어요...... .(그 때 생각이 났는지 박 지사장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뒤로도 아이는 출근하는 절 잡고 목 놓아 통곡하던 때가 몇 번 있었어요. 좀 더 크면서 일하는 엄마가 좋다고 저를 안심시키더군요.

 

남편 또한 결혼 초창기 때 일을 그만뒀으면 하는 말을 꺼낸 적이 있어요. 미안하지만 결혼하면서 일을 그만두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고 했고 아이 낳으면 그 때 다시 생각하자고 설득하며 넘어간 적이 있어요.

 

남편은 집안일에 일체 관여하지 않았고,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 시댁어른들 뵈러 다녔으니까 저 나름대로 한다고 할 만큼 최선을 다했어요. 크면서 아들이 오히려 제 아빠를 가르치더군요. 세탁기, 청소기 사용법, 찌개 만들기 등을 가르치는 통에 요즘은 남편이 집안 살림을 곧잘 합니다.”


박 지사장은 자신이 다른 여직원들에게 누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살았다고 한다. “남자는 100번 중 99번 실수를 해도 별 말을 하지 않지만 여자가 하는 단 한 번의 실수에, 여자는 다 그렇다는 식의 말이 나와요.”


직장 여성들에게 강박처럼 따라다니는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을 박 지사장의 고단함이 있었을 것이다. 여성 동료나 상사는 어땠는지 질문했다.


“지금 기업전략고객본부의 이영희 본부장님은 제가 늘 의지했던 동료이자 상사였어요. 기술고시로 입사했기 때문에 같이 입사했지만 직급이 높은 상사였는데, 힘들 때 의지가 된 분이예요. 90년대에는 여성 과장급 이상 직원들 간에 비공개 모임을 만들어 자체에서 강사도 모시고 강의를 듣는 등 여성 직원들의 역량강화를 위해 노력을 했어요.”


현재 KT의 여성 고위임원은 3명인데 모두 전략기획팀 소속으로 이영희 본부장을 비롯해 고객전략 본부장 송영희 전무, 개인고객전략 본부장 양현미 전무가 그들이다. 이석채 KT사장은 취임 후 이영희 본부장을 전격 승진, 임명했고 다른 두 사람은 외부에서 영입했다.


“직장에서는 누구나 성실하게 일해요. 여성이 승진에 유리하려면 성실함만이 아닌 특별한 일을 개발하고 업무 연장선에 놓여 있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해요. 여전히 인사고과에는 남성 우선이라는 인식이 있어요. 실적으로 봐서는 1,2위를 했는데도 업무 플러스 알파가 있지요.”


또 한 편으로 직원 복지를 위해서 필요한 일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박 지사장은 인력관리실의 복지팀을 이끌기도 했다.


“그 때 제가 무엇보다 관심 두고 추진했던 일은 육아휴직과 관련된 사안이었어요. 80년대만 해도 출산 후 2주 쯤 지나면 전화해서 왜 출근하지 않느냐고 채근하던 때가 있었어요. 저는 육아휴직을 강력히 주장했어요. 국가의 건강을 위해서 투자하는 것이라고 설득했어요. 여성 직원들에게도 특히 첫째 아이 출산 시에는 반드시 육아휴직을 챙길 것을 말하기도 했지요. 현재 YWCA 기획이사로 활동하고 있는데 변도윤 여성부장관과도 만날 때 육아휴직 실시와 관련된 정책에 대해 얘기를 나누기도 해요. 저는 이 일만큼은 꼭 확대되고 잘 실시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지금 저는 행복합니다.”

 

 

KT의 정년은 만 58세로 2012년 12월이면 박 지사장도 정년을 맞게 된다.


정년퇴임 후에는 지금 하고 있는 사회활동을 좀 더 확대해볼 생각이라고 밝혔다. 박 지사장은 특히 환경운동을 크게 생각했다. 지금도 YWCA 활동과 환경연합단체 활동도 하고 있으나 더 넓게 하고 싶다고 포부를 드러냈다.


그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고 했다. “행복합니다.” “행복은 긍정적인 생각으로 창출해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억지로 행복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녀를 보고 있으면 ‘아, 이 사람 행복하구나’, 라고 단번에 느낄 만큼 밝고 경쾌했다.

 

이런 사람 만나기 쉽지 않다. 물론 행복감을 전달 받던가 또는 의심하며 의아해 하든지, 그건 전적으로 그녀를 보는 당신 자신에게 달려있다. 


박향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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