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09. 11. 12.
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
김 세 현
행정학박사 / 호원대겸임교수
“ 누구나 실수는 있다 功(공)과 過(과)를 정확히 기록해
후세들이 옭고 그름을 판단하게 해야지 일방적 매도는 곤란하다 ”
을사년인 1905년 11월 17일 한국정부의 박제순과 일본정부의 하야시 곤스케에 의해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됐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1945년까지 일제 36년이라고 하나 실제 이 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운명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항거해 당시 황성신문의 주필이었던 장지연은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란 논설을 쓰게 된다.
“오늘 목 놓아 크게 우노라”는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비난하고, 을사오적은 우리나라를 남에게 팔아 백성을 노예로 만들려는 매국노임을 규정했고, 고종 황제가 을사조약을 승인하지 않았으므로 조약은 무효임을 전 국민에게 알렸다.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천만 동포여, 노예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 기자조선 이래 4천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를 외친 선생의 기개에 일본은 놀라고 국민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런 장지연 선생이 말년에 어떤 연유로 얼마나 친일을 해서 일본에 큰 도움을 주었는지 모르지만 10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친일 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리는 수모를 겪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물론 역사는 바로 쓰여져야 하며, 몇 백년이 지나더라도 조국과 민족을 배신해 개인의 영달을 취한 자들은 단죄해야 한다.
그러나 젊은시절 한 번의 실수나 말년에 글 몇 자 적은 것으로 조국을 배신한 것으로 낙인찍는 것은 곤란하다.
누구나 실수는 있는 법이다. 다만 그의 功(공)과 過(과)를 정확히 기록해 후세들이 올바로 살아가는데 본보기를 삼는 것이 친일 인명사전 발간의 진정한 의미라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 조국의 광복을 위해 스러져간 이름 없는 수많은 분들도 찾아서 인명사전을 만드는 일도 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얼마 전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분들은 국가에서 나름대로 보상을 받은 것으로 안다.
그들도 대학시절엔 빨갱이 취급받고 친북인사로 몰렸던 것도 사실이다. 하물며 전 재산을 털어 광복군을 지원하거나, 몸을 던지며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신 분들의 명단은 안 만들고, 민족의 큰 인물들을 악질 친일파들과 함께 실어 집단 매도하는 것은 좀 너무해 보인다.
물론 연구소 측도 명단을 발표하기 전에 이런저런 고민을 많이 했을 것으로 안다.
이제 명단은 발표됐고 나라는 뒤숭숭하다. 우리 민족의 당면과제는 통일이다. 따라서 민족문제연구소가 민족이라는 이름을 걸고 활동하려면 민족분단의 원흉을 찾아내고 소위 친북인사 명단을 만드는 일도 병행해야 한다.
또한 가정을 버리고 조국광복에 모든 것을 바쳐 자식도 없고, 있어봐야 제대로 공부도 못해 대대로 가난을 면치 못하는 분들에게 우리 조상이 독립운동가였다는 것을 증명해 주기 위해서라도 독립운동 참여인사명단도 만들고,
정부는 그들에게 민주화 인사 못지 않는 합당한 대우를 해주어야 하는 것이 공정해 보인다.
신문사 주필로서 목숨을 걸고 일본의 간악함과 우리정부의 무능함을 국민에게 알렸던 장지연 선생에게 우리정부와 국민은 애국지사 칭호 외에 무엇을 해주었는지 궁금하다.
선생이 지하에서 요즘 나라 돌아가는 나라꼴을 본다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할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에는 목숨을 건 일이었는데 지금은 아마도 억울해서 목 놓아 우실 것이다. 필자도 같이 울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