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10. 08. 05.


지은이: 김종성
브랜드: 역사의 아침
출간일: 2010-07-23
가   격: 14,500원

 

책소개

제4의 제국, 가야 문명 탐사. 가야는 동아시아의 문명의 용광로였다!

 

• 동아시아 고대사의 미스터리를 간직한 가야, 그 잃어버린 역사의 고리를 추적한다

금관가야의 실체를 유물로 확인한 1990년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발굴 이후 가야의 재조명이 급물살을 탔다. 가야는 이제 ‘잃어버린 왕국’에서 삼국보다 앞선 문명을 가진 강력한 ‘제4의 제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또한 현재 MBC에서 가야를 다룬 대하사극 <김수로>를 방영하는 등, 그 어느 때보다 가야의 연구와 관심이 활발한 이때, 충실한 고증을 통해 가야의 역사를 다룬 책이 출간되었다.
선진 철기문명과 해양무역을 통해 독자적인 경제발전과 문화를 이루었던 가야를 재조명한『철의 제국 가야』는 가야 역사의 주역이었던 김수로를 중심으로, 삼국의 역사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던 ‘철의 제국 가야’의 모습을 다양한 각도로 복원해냈다.
당시의 국제정세와 역사적인 정황들을 살펴보면서 점차 범위를 좁혀 가야의 실체에 접근하고 있는 이 책은 잃어버린 역사의 고리를 추적하여 완성시키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 8가지 주제로 파헤친 잊혀진 왕국 가야의 실체

가야는 신라를 속국으로 만들고 일본에 분국까지 설치한 동아시아의 놀라운 문명국이었다? 중국 문명의 기초는 김수로왕의 조상이 만들었다? 김해 김씨의 시조 김수로왕은 흉노족이다? 역사상 최초의 국제결혼 커플은 김수로와 인도 여인 허황옥이다?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은 가야의 후손이 오늘날 전 인구의 10퍼센트나 되는 이유는? ? 이 책에는 우리가 궁금해하던 수수께끼 왕국 가야에 관한 흥미로운 키워드들이 곳곳에 숨어 있어 무엇보다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가야는 여전히 많은 부분 고대사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가야에 대한 역사 기록이 거의 없는 것과, 가야가 존재했던 시대를 아직까지도 삼국시대라 부르고 있는 학계의 편견이 아직까지도 가야의 제자리를 찾아주는 데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철의 제국 가야』에서는 우리가 ‘삼국’이라는 편견을 버리게 될 만한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은 삼국보다 앞선 철기문명을 가지고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며 강력한 연맹국가로 성장했던 가야의 실체를 8가지 주제로 접근해 날카로운 분석을 시도했다. 가야 토착 집단, 김수로 집단, 석탈해 집단, 허황옥 집단이 가야 문명의 건설에 참여한 과정을 중심으로 가야의 건국에서 멸망까지 통합적이고 입체적으로 조망했다. 또한 철의 강국, 해상무역 대국, 다양한 문화를 융합한 선진 문명국으로서의 가야의 역사적 의의를 새롭게 조명했다.
이 책은 한국사 편향이 아닌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그리고 역사학 편향이 아닌 문사철(文史哲)의 통합적 시각에서 가야사를 전면적으로 해부했다. 이 책에는 중국사를 위협하고 한국사를 위협하고 나아가 동아시아사를 위협할 정도의 역사적 사실들이 담겨 있다. 그동안 한국 사회가 가야사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했는지, 한국사가 실제로는 얼마나 스케일이 큰 역사였는지 이 책을 통해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가야사와 한국사 그리고 동아시아사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 동아시아 고대사를 뿌리째 흔든 가야사의 놀라운 위력

- 가야사에는 중국사의 근간을 밑바닥에서부터 파괴할 만한 ‘어뢰’들이 숨겨져 있다.
중국 문명의 기초인 한나라 역사의 상당 부분이 김수로의 조상들에 의해 형성되었고, 그 역사가 결국 김수로의 조상들에 의해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 등이 알려진다면 아마 한국인들보다도 중국인들이 더 큰 충격에 휩싸일 것이다.
한나라에 패해 포로가 되었다가 한무제의 신임을 얻어 곽거병 가문과 함께 대제국의 경영에 참여한 흉노족 김일제와 그 후손들. 기원전 66년부터는 곽거병 가문을 제압하고 단독으로 한나라의 실권을 장악한 김일제의 후손들. 그들은 바로 김수로의 조상이었다. 또 서기 8년에 한나라 황실의 명맥을 끊고 신나라를 건국한 왕망 역시 왕씨가 아니라 김일제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왕망도 실제로는 김수로의 조상일 가능성이 큰 것이다.
이와 같이 중국 문명의 기초인 한나라 문명의 상당 부분은 한족이 극히 경멸하는 북방 흉노족 출신인 김일제 가문에 의해 경영되었다. 한족 외에는 죄다 야만족으로 치부하는 주류 중국인들이 이런 사실을 접하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사실들은 한민족이 중국 문명의 수혜자라는 중국인들의 관념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 한나라 문명을 경영했던 김일제 가문이 가야 문명의 건설에 참여했고, 가야 문명이 신라와 고려와 조선을 거쳐 대한민국에까지 계승되고 있다면, 동아시아 문명의 주역이라고 자부하는 중국인들의 자긍심은 냉정한 현실 앞에서 굴절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 가야사에는 한국인들의 민족관념을 송두리째 파괴할 만한 폭탄들이 내장되어 있다.
한민족은 결코 단일민족이 아니다. 여러 민족이 융합되어 한민족이라는 또 하나의 아이덴티티를 형성했던 것이다. 이 점은 다른 한민족 왕조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한민족의 고대왕국들은 하나같이 토착세력과 외래세력의 결합으로 건국되었다. 각 왕조가 최소한 두 개 이상의 종족 혹은 민족의 결합에 의해 형성되었던 것이다. 한민족이 정말로 하나의 혈통으로만 이루어졌다면, 다민족적 측면이 특히 강했던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는 앞으로 한국사에서 제외해야 할 것이다. 가야라는 나라가 토착세력과 북방 흉노족, 남방 인도인들의 결합에 의해 태어났다는 사실, 알래스카가 마주보이는 캄차카 반도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석탈해 집단까지 가야에 머물다 신라로 넘어갔다는 사실, 유라시아 대륙의 곳곳에서 몰려든 세력들이 가야 문명의 건설에 참여했거나 혹은 참여하려 했다는 사실 등을 통해 우리는 가야라는 나라가 비록 영토는 넓지 않았지만 세계 문명을 가슴에 품은 ‘작은 거인’이었다는 경외심을 품게 될 것이다. 가야는 혈통 따위에 연연해하지 않은 진정한 의미의 다민족 국가였던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가야 외의 다른 왕국들 역시 그러했다. 조선 역시 고려인과 여진족의 연합 속에 건국되지 않았는가. 가야사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를 계기로, 한국 고대사가 수많은 민족들의 무대였다는 점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 가야를 평가한다

- 유라시아 문명의 용광로
문명의 건설에 참여한 세력들의 이동 범위가 매우 광범위했다. 유라시아 대륙 최동단에 있었던 가야 토착세력, 유라시아 대륙 북부에 있었던 흉노족 일파, 유라시아 대륙 남부에 있었던 인도인 집단이 일련의 이동 과정을 거쳐 가야 문명 건설에 참여한 것에서 드러나듯이, 가야의 건설자들이 자신들의 본거지로부터 가야 땅까지 도달한 거리는 유라시아 대륙의 절반에 해당했다. 가야에서 쫓겨난, 캄차카 반도 출신으로 추정되는 석탈해 집단까지 합할 경우, 그 거리는 유라시아 대륙의 절반을 훨씬 넘는다. 이 점은 가야 문명이 유라시아 문명의 축소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야라는 나라는 인류 역사에서 보기 드물게 단기간에 다양한 문명을 한데 융합한 문명의 용광로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는 가야가 문화적 다양성을 품고 출발한 나라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 최초·최후의 현해탄 중심 국가
이제까지 현해탄에 인접한 국가들 중에서 가야처럼 현해탄 양쪽의 자원과 역량을 통합적으로 동원하여 자국의 대륙 정책을 수행한 제국은 없었다. 이 같은 사실을 통해 다음 세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대륙과 일본 열도가 그처럼 순조롭게 연결된 시기는 가야시대밖에 없었다.
둘째, 가야의 멸망이 한·일 갈등의 출발점이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가 만성적인 대립관계로 악화된 데는 두 지역의 평화로운 매개자였던 가야의 멸망이 주요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가야와 일본의 관계가 가야 유민들에게 탈출구를 제공했다. 가야 멸망 후에 유민들이 일본 열도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가야가 현해탄 중심 국가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유라시아적 융합을 통해 형성된 가야 문명은 현해탄 중심 국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 열도에 자신의 문화적 분신을 남길 수 있었다.

- 죽고 나서 더 질긴 가야의 혼
가야는 무려 520여 년간 존속한 나라다. 562년에 신라에 의해 멸망했다고는 하지만, 크게 두 가지 점에서 볼 때 가야의 생명력은 그 후로도 단절되지 않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첫째, 망국 가야의 후손들은 점령국 신라에서 신속히 기반을 잡았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왕권까지 장악했다. 둘째, 오늘날 한국인의 10분의 1은 김수로의 후손인 김해 김씨다. 이미 1500년 전에 왕통이 끊긴 김수로의 후손들이 한국의 최대 혈통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가야의 시조 김수로의 후손이 세계 10대 무역국인 대한민국 인구의 10퍼센트 정도를 차지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유라시아적 융합에서 상징되는 가야의 다양성과 포용력이 반영된 결과라고 평가할 수 있다. 가야라는 나라는 비록 1500년 전에 멸망했지만, 가야의 혼은 아직도 생생히 살아 있다. 철의 제국 가야는 살았을 때 못지않게 죽고 나서도 더욱 강하고 질긴 혼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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