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13. 06. 19.


천안함 박정훈 병장과 그의 할아버지

 

서울북부보훈지청장  강성만

 

 

"아부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만도는 깜짝 놀라며,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만도의 두 눈은 무섭도록 크게 떠지고 입은 딱 벌어졌다. 틀림없는 아들이었으나, 옛날과 같은 진수는 아니었다. 양쪽 겨드랑이에 지팡이를 끼고 서 있는데, 스쳐가는 바람결에 한쪽 바짓가랑이가 펄럭거리는 것이 아닌가. 만도는 눈앞이 노오래지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한참 동안 그저 멍멍하기만 하다가, 코허리가 찡해지면서 두 눈에 뜨거운 것이 핑 도는 것이었다.
"에라이 이놈아!“
-하근찬의 수난이대(二代) 중에서-

 

 누가 소설을 일컬어 ‘현실을 보다 극적으로 각색한 것’이라 했는가.
 박대석의 사연은 소설보다 처절하다. 그의 작은 아버지 박동석은 1951년 7월 강원도 고성지구 전투에서 20세의 나이로 장렬히 전사하여 유해가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박동방은 6.25 전쟁에서 미7사단 31연대 기갑대대 소속으로 경기지구 전투에 참전하여 두 귀의 청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1950년 10월에 명예제대한 후 평생 전상의 후유증을 안고 살다가 2005년에 돌아가셨다. 그의 어머니는 두 귀가 멀어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생때같은 자식들을 위해 평생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갖은 고생을 다 하였다. 혹자는 전쟁 때 고생 안 한 사람이 어디있느냐고 한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이것이 끝이 아니다.
 3년전 온국민을 슬픔에 잠기게 했던 천안함 46용사중 막내뻘인 故박정훈 병장의 아버지가 바로 그, 박대석이다. 아들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곤 했던 바다, 그가 해군에 복무할 당시 출동했던 그 백령도 바다에서 아들과 함께 천안함이 가라앉았다. 해군에 입대하여 국가를 위해 충성하라고 자식에게 적극 권유했던 아버지는 아들을 바다에 묻고 내 탓이라고 하며 지금도 자책의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소설 ‘수난이대’에서 만도와 진수는 만났다. 아버지는 한쪽 팔이 없고, 아들은 한쪽 다리가 없지만 그 둘은 함께 살아갈 것이다. 서로에게 힘이 되어 줄 것이다.  하지만 박대석에게는 다시 돌아와 ‘아부지!’ 하고 불러 줄 아들 정훈이가 이 세상에 없다. 그는 전쟁으로 야기된 혈육의 희생을 감내해야 한다. 그가 견디고 살아내야 할 인생의 무게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천안함 폭침 3주기가 지나고 조국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잔인한 6월’이 왔다. 천안함 46용사의 가족들을 비롯해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가족들이 그들의 장한 아들을, 대한민국의 위대한 아들들을 만나러 갈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 아들을 잊지 말아 달라고,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해 달라고.
 유족들의 슬픔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에서 기인하는 것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겠지만, 사랑하는 이들의 희생이 점차 국민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져버린다는 안타까움도 그 못지않게 유족들을 슬프게 한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호국보훈의 달에는 박대석에게 반가운 소식이 있다. 故박정훈 병장의 모교인 대광고등학교에서 ‘천안함 순국 추모비’를 건립하며 추모비 제막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조국을 수호하다 순국한 故박정훈 병장과 천안함 46장병들의 희생을 기리고 그들을 기억하고자 함이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희생을 잊지 않고 이들을 추모하는 우리의 보훈의식이 유족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기를 바란다.

 영국의 처칠 수상은 “피를 흘려야 할 때 피를 흘리지 않으면 남의 노예가 된다.” 고 말한 바 있다. 일제 강점하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피를 흘렸고, 이 땅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6.25전쟁에서 우리나라의 젊은이뿐만 아니라 UN참전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 땅위에서 피를 흘렸다.

이들의 피흘림과 숭고한 희생위에 지금의 번영된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국가유공자의 희생에 감사하고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들의 희생을! 남겨진 자들의 슬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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