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16. 05. 11.
푸르른 5월의 삼각산을 바라보며...
서울북부보훈지청 보훈과 정병강
실록이 푸르른 5월. 숲이 우거진 삼각산을 바라보며, 그 아래에 잠들어 계신 애국지사 김창숙 선생을 떠올려 본다.
병상에서 잠 못 들고 백범과 단재를 생각하며 [病枕無寐憶白凡丹齋二公]」
백범은 흉탄 앞에 쓰러지고/ 단재는 수문랑으로 멀리 갔네/ 가련할손, 홀로 남은 심산 노벽자/ 여섯 해 삼각산 아래 몸져 누웠도다. [白凡化爲凶彈鬼 丹齋去作修文郞 獨憐心山老?子 六年臥病三角陽]
- 심산(心山), 『김창숙문존』에서 인용
심산 선생께서는 "성인의 글을 읽고도 성인이 세상을 구제한 뜻을 깨닫지 못하면 가짜 선비"라며, 일생을 일관된 자세로 불의와 독재에 맞서 조국독립과 정의를 위해 싸우신 진정한 선비이시다. 선생께서는 일찍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의 참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셨으며, 일제의 사주를 받은 일진회가 한일합병론을 제기하자 즉각 신문지상에 성토문을 발표하여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셨다.
또한, 독립운동이 침체에 빠지자 의열단원 나석주 의사로 하여금 동양척식회사를 폭파토록 하고, 우리 민족의 의기를 대외에 천명하시는 한편, 임시정부의 재건에도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셨다. 해방된 조국에서도 선생께서는 반독재 투쟁에 앞장서 두 차례나 투옥되셨으며, 민족의 동량을 길러 내기 위한 성균관대학을 설립하여 교육운동에 투신하시기도 하셨다.
특히, 선생께서는 1927년 맏아들 환기가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하는 일을 겪기도 하셨으며, 같은 해 선생께서도 지병의 악화로 입원 치료를 받던 중 일제에 체포되었다. 부산을 거쳐 대구로 압송된 선생께서는 모진 고문에도 꺾이지 않는 독립 의지를 시로 쓰셨다.
조국의 광복을 도모한 지 십여 년/ 가정도 목숨도 돌아보지 않았노라./ 뇌락한 나의 일생 백일하에 분명하거늘/ 야단스럽게 고문을 벌일 필요가 무엇이뇨.
선생께서는 일제의 타협을 끝내 거부하며 악독한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셨으며, 대학을 세우고 학장?총장을 지내고서도 서울에서 집 한 칸 없는 곤궁한 생활 속에서 셋집에서 여생을 보내셨다고 한다.
나는 선생의 삶을 생각하며 내가 지금 누리는 자유와 풍요로움의 소중함과 책임감을 느낀다. 다가오는 5월 10일은 선생께서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몸 바치시고 세상을 떠나신 지 54년이 되는 날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심산 선생을 기리는 추모제 열릴 푸르른 5월의 삼각산을 바라보며 가슴 찡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