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21. 09. 08.
존중문화도시 도봉(道峯) 이야기
▲민경찬 (문화도시추진단장)
2018년 처음 시작된 ‘문화도시 사업’은 2022년까지 30개의 법정 문화도시 선정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사업이 벌써 4년차에 접어들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모든 도시는 특별하다’는 관점으로 이 사업을 시작하였고, 문화도시 계획 안에 각 도시만의 특별함을 담아낼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른 도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도봉만의 것은 무엇이 있을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이를 위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도봉’이라는 이름의 유래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도봉구(道峯區)는 지역에 있는 명산인 도봉산(道峯山)에서 이름을 따왔다. 그러면 산 앞에 붙인 ‘도봉(道峯)’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 도봉산의 이름의 유래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학문을 연마하고자 도(道)를 닦았던 봉우리(峰)’에서 나왔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왕조를 여는 길(道)을 닦은 봉우리(峰)’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이 이야기들은 어디서 나왔을까? 두 개의 다른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하나로 연결된 이 이야기의 근원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이야기는 일단 ‘도봉서원’에서 시작된다.
서원(書院)은 학덕이 높은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고, 지역의 인재들을 교육하던 조선의 지방 고등교육기관이다. 조선시대 한양에는 총 5개의 서원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도봉서원은 조선 전ㆍ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조광조와 송시열을 한 사액서원(賜額書院:조선시대 국왕으로부터 편액·서적·토지·노비 등을 하사받아 그 권위를 인정받은 서원)으로 백사 이항복 등 저명한 시인 묵객들이 시문을 남긴 오늘날 서울 지역 내 가장 대표적인 서원이었다. - 하지만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이 왕권 강화 차원에서 단행한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도봉(道峯)’이라는 이름은 1573년(선조6년) 조광조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이 창건 될 때 받은 이름이었다. 그 이름은 단지 이름만으로 그치지 않고, 실제로 많은 선비들이 학문을 연마하고 도를 닦는 봉우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이렇게 선비들이 아름다운 자연을 벗 삼아 공부하던 도봉서원이 위치한 산의 이름이 ‘도봉’이라 불리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봉’이라는 이름이 ‘조선왕조를 여는 길을 닦은 봉우리’에서 나왔다는 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 도봉서원이 시작되게 했던 조광조의 정치사상을 정리했던 율곡의 말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율곡은 조광조가 이상정치(지치, 至治)를 위해 추구한 핵심 과제를 요약하여 ‘도의를 숭상하고’(숭도의, 崇道義), ‘인심을 바로잡으며’(정인심, 正人心), ‘성현을 본받게 하는 것’(법성현, 法聖賢)이라 했다. 조광조는 그 이상정치의 주체가 임금의 마음임을 강조하고 있지만 궁극적 목표가 백성을 위한 것이요 백성을 보호하는 것임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도학적 이상정치가 ‘민본(民本)’의 원리를 실현하는 데 있는 것임을 의미한다.”(한국유학의 탐구, 1999. 6.10. 금장태) 이러한 ‘민본(民本)’의 원리이야 말로 조선이라는 새 나라를 열었던 정도전이 꿈꾸었던 나라의 기초가 되는 사상이었다.
예로부터 ‘봉우리’는 먼 길을 갈 때, 전체를 조망하기 위한 장소로 인식되었다. 고려라는 오랜 나라를 뒤로하고 새로운 나라의 새로운 길을 닦는데 있어서, 그 길을 시작하는 봉우리처럼 중요한 곳이 있을까? 정도전이 택한 ‘조선왕조를 여는 길을 닦는 봉우리’는 다름 아닌 맹자의 ‘민본’사상이었다. 정도전은 유학, 그 중에서도 맹자라는 봉우리에 올라 새로운 나라의 길을 바라보았고, 그 봉우리의 중심에는 ‘백성’이 있었다.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社稷)은 다음이며, 군주는 가볍다. 이런 까닭으로 구민(들판의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천자(天子)가 되고 천자의 마음을 얻으면 제후가 되고 제후의 마음을 얻으면 대부(大夫)가 된다” 『맹자』의 진심하(盡心下) 중에서
조선은 ‘백성이 근본이며, 백성이 가장 귀하다’ 민본사상으로 시작된 나라였지만, 이 사상이 온전히 구현되지는 못하였다. 다만 그 봉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움직여왔던 나라였다. 그리고 도봉은 시대를 뛰어넘는 그 귀한 생각이 풀뿌리처럼 뿌려지고 자라난 아주 특별한 지역이었다. 정도전의 생각은 조선시대의 조광조와 송시열을 거처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얼을 지키기 위해 재산과 젊음을 쏟아 부으셨던 김병로, 정인보, 송진우 선생 같은 분들에 의해 이어졌다. 또한 ‘맨 사람’, ‘백성(民)’을 ‘씨ᄋᆞᆯ’로 보며 ‘씨ᄋᆞᆯ’과 함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자 했던 함석헌 선생과 민주주의를 열어갔던 시민들의 민주화운동을 통해 구체화 되었다. 백성들을 위한 글을 만들기 위해 온 마음을 쏟았던 세종대왕의 둘째 딸 정의공주, 세종대왕을 통해 만들어졌던 훈민정음의 뜻을 담은 해례본을 찾아내고 지켜내기 위해 온 삶을 걸었던 전형필, 조선말과 일제강점기 기울어진 수레와 같던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바로 세우고, 남녀평등과 여성교육이라는 새로운 길을 열었던 차미리사선생, 민주화 시대의 숨은 공로자 계훈제선생,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산 역사 김근태선생,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해 항거하며 노동자의 인권을 향한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전태일열사, 그리고 이어진 시민사회의 풀뿌리 민주주의 운동…. 한 때 도봉에 살며 이곳에서 함께 호흡했던 이 사람들이 걸어왔던 ‘길(道)’은 한결같이 ‘민본(民本)’이라는 높은 ‘봉우리(峯)’에서 시작된 길이었다. 나라가 바뀌고,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근현대사의 질곡을 지나는 동안에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던 이 놀라운 길이 시작된 도봉은 참으로 새로운 나라를 여는 길을 닦을 만한 높은 봉우리였다.
이러한 도봉에서 도봉만의 특별함을 담은 문화도시를 계획하며 준비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도봉(道峯)’의 뜻과 길이 담긴 문화도시여야 할 것이다.
다른 도시가 흉내 낼 수 없는 우리만의 것을 담아내면서도, 그것을 오늘의 언어와 문화로 풀어낸 우리만의 독특한 무언가가 담긴 문화도시 도봉은 마땅히 ‘민본(民本)’이라는 높은 봉우리에서 시작된 길어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을 귀하게 여기며 존중하고, 그 사람들이 소중히 여겼던 자연과 각 지역의 문화를 소중히 여기며, 지역의 시민들이 주체가 되어 함께 만들며 풀뿌리처럼 이어져 왔던 민주시민의 도시 도봉의 이야기를 이제는 오늘을 살아가는 도봉의 시민들이 함께 만들어가야 할 차례다.
참고자료 :
도봉구 문화관광 홈페이지(https://tour.dobong.go.kr),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wiki/도봉구),
한민족문화대백과
<한국유학의 탐구> 1999. 6.10. 금장태, 서울대학교출판부
<인간혁명> 함석헌저작집2. 1976.12.24. 한길사
<차미리사평전>, 2008.7.16. 한상권, 푸른역사
<전태일평전> 1983.6.20. 조영래, 한영문화사